Page 5 - 문자와상상 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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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의 말







                           물새발자국을 따라 걷기






                              여기 한 소녀가 있습니다. 머리에 붉은색 두건을 동여맸습니다. 한손에는 갈고리를 들었고 어깨
                           에는 망태기를 맸습니다. 일하러 갔다 돌아오는 길일까요. 그녀는 뒤를 돌아봅니다. 먼 바다에 파
                           도가 일렁이고 바닷가 모래밭에는 발자국이 찍혔습니다. 물새 발자국일 듯한데, 새들은 멀리 바다

                           위를 떠돕니다. 모래 언덕엔 풀과 함께 불가사리와 소라고둥이 모여 있습니다. 왠지 적막하고 쓸쓸
                           한 어느 하루가 그렇게 저물어갈 무렵 노래가 들려옵니다.


                              해저문 바닷가에 물새 발자옥
                              지나가던 실바람이 어루만져요
                              고 발자옥 이쁘다 어루만져요



                              윤복진의 시에 박태준이 곡을 붙인 가곡  「물새발자옥」입니다. 이 가곡을 표제로 한 가곡집  『물새
                           발자옥』 (교문사, 1939)은 화가 이인성의 목판화를 표지로 삼았습니다. 시와 노래와 그림이 어우러
                           져 만들어진 걸작 예술품입니다. 그때의 시인도, 작곡가도, 화가도, 출판인도, 인쇄인도 모두 이제
                           는 물새발자국처럼 자취를 감추고 말았지만, 그들이 공들여 쓰고 그리고 만든 정신의 수공예품은
                           외려 시간의 결을 거슬러 그 품격이 높아만 갑니다.
                              소설가 상허 이태준은 “출판물의 최후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실로 활자 호수에서부터 제본까지
                           를 통제하는 장정” ( 「여묵餘墨」 ,  『문장』  1939년 2월호)이라고 말했습니다. 책은 활자와 종이로 만들
                           어진 하나의 사물이지만, 거기에 형태와 색채, 감각을 부여함으로써 정신의 예술품으로 거듭나게
                           했던 것이 예술가, 곧 삽화가, 장정가, 만화가들이었습니다.

                              지상의 예술가들은 문자의 배치에 논리적 질서를 부여할 줄 알았습니다. 또한 추상적이고 개념
                           적인 지식에 점과 선과 면, 색채와 구도를 더함으로써 지면의 공간을 건축하고 감각의 기하학을 완
                           성했습니다. 작가의 시와 산문이 언어를 빚어 정신의 형태를 만들었다면, 화가의 캔버스와 물감은
                           문자의 추상성을 뒤흔들어 작품의 육체를 빚어냈습니다.
                              우리의 근대에 만들어진 책들은 무한 복제되는 미술품이자 화가의 전위적인 실험실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삽화가, 장정가들은 당대의 지적 산물에 생명을 불어넣어주었습니다. 독자들은 그림

                           이 끝난 곳에서 글을 탐구했고, 글이 마친 지점에서 그림의 영감을 받아 더 먼 곳까지 상상력을 밀
                           고나갈 수 있었습니다. 독일의 문예비평가 발터 베냐민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들 책의 표정과
                           기호를 읽어냄으로써 우리 민족의 ‘정신적 삶의 과정’을 탐색할 수 있습니다. 화가 이인성이 그린
                           ‘물새발자국’은 이미 그 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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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담문고 이사장 정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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