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2 - 문자와 상상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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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헌력서의 인간은 텅 빈 시간 안에서 무질서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역주에 의해 인간 행위의 질서와 통일성이 확보된다.
                                        역주는 천문학적 시간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해
                                         인간 행위에 적합한 실용적 시간을 창조한다.
                                       텅 빈 시간이 주는 원초적인 공포, 미래의 불확실성,
                                      매 순간 적절한 행위를 선택해야 한다는 압박감 등이
                                             자연스럽게 점술의 시간을 요청했다.









          도 아닌 달, 또는 5월이면서 6월인 달이다. 그러므로 월건,  보되는 것이다. 역주는 시간과 행위를 매개한다. 즉 역주는
          월백, 월신이 없어서 달과 관련된 길흉이 없는 달이다. 다                    천문학적 시간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해 인간 행위에 적합
          만 윤월에도 달의 합삭, 상현, 망, 하현의 시각, 절일(節日),  한 실용적 시간을 창조한다. 우리는 텅 빈 시간이 주는 원
          일진의 역주는 기입되어 있다.                                    초적인 공포, 미래의 불확실성, 매 순간 적절한 행위를 선

                                                              택해야 한다는 압박감 등이 자연스럽게 역주의 시간, 즉 점
          역주는 시간과 행위를 매개해                                     술의 시간을 요청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상황에 따라
            이 글의 첫머리에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조                    임의적으로 점을 쳐서 적합한 행위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
          선시대의 시헌력서는 매우 복잡하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라, 천문학적 시간이 산출하는 ‘자동 점술’의 구조 안에서
          매우 복잡한 미래를 구성했고, 매우 복잡한 시간 안에서 살                    인간 행위의 적합성을 확보하는 것이 사회에 더 큰 안정감
          았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왜 이렇게 복잡한 미래                     을 주었을 것이다.
          가 필요했는가? 그리고 조선시대의 복잡한 역서에서 어떤                        그러나 근대 과학이 도입되면서 조선 사회는 차츰 텅 빈

          내용이 사라지면서 역서가 더 단순한 것으로 변했는가?                       시간이 주는 불확실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시간의 길흉
            시헌력서는 아직 오지 않은 일 년, 즉 미래의 시간을 구                   구조에 의해 인간 행위의 의와 불의가 미리 정해지는 것이
          성한다. 현재 우리의 달력처럼 시헌력서에서도 1년은 월,  아니라는 인식이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일, 절후로 구성된다. 그런데 시헌력서에는 시간을 수식하                     사유의 역전을 초래했다. 이제는 인간의 선택이 낳은 자유
          는 무수한 역주(曆註)가 붙어 있다. 바로 이 역주가 시헌력                   로운 행위가 시간의 길흉을 낳는다는 인식이 사회를 지배
          서를 복잡하게 만든 주요인이다. 먼저 연신방위지도라는  하기 시작했다. 이성적인 사유와 합리적인 실천이 더 좋은
          ‘공간 역주’는 일 년의 시간을 토대로 일 년의 공간 전체가  시간, 더 길한 미래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제 시간의 길흉
          지닌 길흉(吉凶)의 구조를 도식화한다. 시간과 공간의 질                     은 미리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선택과 결단에 의해

          적 성격은 철저히 맞물려 있다. 공간을 지배하는 신도 ‘시                    산출된다. 시간을 낳은 것은 우주지만, 시간의 길흉을 낳은
          간의 신’인 연신이다. 공간은 24방위별로 인간 행위의 길흉                   것은 인간이다. 따라서 역서의 역주는 자유로운 인간, 합리
          을 도식화하고 있다. 그리고 역일에도 일진, 납음오행, 이                    적인 인간, 이성적인 인간이라는 근대적인 가치를 부정하
          십팔수, 십이직의 ‘시간 역주’가 붙어 있다. 이로써 역일은  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역주의 소멸은 이러한 인식의 전환
          운명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예측하는 도구가 되고, 나아가  이 낳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결과물이었던 셈이다.
          시간의 길흉 구조를 드러낸다. 또한 역일의 길흉 구조는 사
          회적으로 중요한 인간 행위를 의(宜)와 불의(不宜)의 도식
          에 의해 질서화한다.

            시헌력서의 인간은 텅 빈 시간 안에서 무질서하게 행동
          하지 않는다. 역주에 의해 인간 행위의 질서와 통일성이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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