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 - 문자와 상상05호
P. 8

한다는 것은 그 하늘이 천명을 부여한 왕의 지위를 보증해                     를 1년이라 하고, 달의 삭망주기를 음력의 한 달이라고 정
          주는 상징이었다.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일은 백성들의                      했다. 그러나 양력의 한 달 주기는 천체운동의 주기와는 아
          필요가 아니라, 통치자의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관상                     무 관계가 없고, 편의상 1년을 12로 불균하게 나누어놓았
          과 수시를 잘하는 것이 제왕 된 자의 권한이자 책무였던 것                    을 뿐이다. ‘역’에서의 문제는 1년, 1월, 1일의 시간 단위가
          이다.                                                 정배수로 되어 있지 않은 데 있었다. 이 때문에 여러 가지
            동아시아의 정치사에서 관상과 수시는 천문학적인 활                       역법이 고안되었고 개력을 거듭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동일 뿐 아니라 고도의 정치적 사안이기도 했다. 혁명이 일
          어나 새로운 왕조가 들어설 때에는 거의 필수적으로 천문                      조선 후기에 20여만 부 넘게 발행
          전문가를 동원해서 새로운 관상과 수시의 시스템, 즉 새로                       조선시대에 사용된 달력은 대통력과 시헌력이다. 먼저
          운 역법을 제정해 반포했다. 이른바 ‘수명개제(受命改制)’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대통력은 1580년 경진년 대통력(庚
          의 원칙에 따라 ‘개력(改曆)’이 이루어졌다. 개력의 원칙은                   辰年大統曆)이다. 경진년 대통력은 활자본으로 총 1책 16
          이전 왕조의 역법보다 더욱 정확하고 우수한 것이어야 했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진왜란 이전의 활자본으로 대통
          다. 그러나 새로운 왕조의 개창과 천문학의 발전은 별개였                     력 가운데서도 자료적 가치가 대단하다. 풍산유씨 종택의
          으므로 역법을 바꿀 때마다 우수한 역법을 제시할 수는 없                     대통력은 서애 유성룡이 사용한 대통력으로 사용자가 알
          는 일이었다.                                             려진 달력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 외 우복 정경세가

                                                              사용한 대통력이 남아 있는데, 대통력은 희귀해 그 자체만
          농경의 지침서로서 귀한 선물                                     으로도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오늘날 흔히 일컫는 달력은 그 특징에 따라 ‘역서(曆書)’                    대통력에 뒤이어 1653년부터 사용된 시헌력은 상용력
          혹은 ‘월력(月曆)’, ‘책력(冊曆)’이라는 명칭으로 다양하게                  이었던 만큼 조선 후기 역서 가운데 가장 많이 발행된 역서
          지칭되었다. 특히 달력은 책의 형태로 제작되어 책력이라                      이다. 불과 4천 건만 인쇄되었던 시헌력은 1762년 1만 3백
          는 이름이 많이 사용되었다. 책력은 천문학과 과학기술이                      축(약 20만부)를 시작으로 점점 증가해 1791년 이후에는 약
          발전한 조선시대에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다. 조선시대 천                       1만 5천 축(약 30만부)이 인쇄되어 관료가 아닌 일반인들도

          문학을 연구하는 기관인 관상감에서 새 달력인 책력을 만                      그 이전보다 손쉽게 역서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1762년
          들어 궁중에 헌납하면 백관에게 나누어 주고 각 관아의 서                     부터 비교적 많은 양의 역서가 인쇄되어 현재 남아 있는 역
          리도 동지의 선물로서 책력을 친지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서들은 이 시기 이후에 발행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것이 이른바 ‘동지책력’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는데 좋은 때와 나쁜 때가
            책력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을 나열한 것에 그치는 것이                     있고 또 좋은 방향과 나쁜 방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화(禍)
          아니라 일상에 필요한 농경생활의 지침서로서 또는 길흉                       와 복(福)도 들어오고 나가는 때가 있다고 믿었다. 혼사나
          화복에 따른 관습적 일상의 지침서로서 활용되었다. 조선                      이삿날의 길일(吉日)을 정하거나 집을 수리하거나 장 담그
          전기에 1만부 정도 발행되던 책력은 조선 후기에 30만부                     는 날도 손 없는 날과 손 없는 방향을 따지는 습관이 있었
          이상 발행되었다. 농경사회에서 24절기에 맞추어 제작된                      다. 옛날의 역서와 현대의 민간력에는 날짜에 따라 길흉일
          책력은 요긴한 선물로서 귀중한 대접을 받는 물건이었다.                      과 길흉의 방위에 대한 역주(曆註)가 함께 실려 있다. 이러

            우리의 전통 달력은 지구의 자전주기를 1일, 공전주기                     한 역주는 음양(陰陽)과 오행설(五行說), 그리고 간지에 음


          6
   3   4   5   6   7   8   9   10   11   1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