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 - 문자와 상상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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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의 말







                           우주적인 시간, 민속적인 상상






                              책상에 놓인 달력을 봅니다.
                              찬 이슬이 내려앉는다는 ‘한로(寒露)’는 한참 지났고,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상강(霜降)’도
                           며칠 전이었습니다. 겨울로 들어선다는 ‘입동(立冬)’이 멀지 않았습니다. 계절은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듭니다. 저 멀리 들판에서 가을걷이를 마친 농부는 집으로 돌아와 밤의 평화를 누립니다.
                           이곳 도시에서는 일을 마친 직장인이 외투 깃을 세우고 가족의 온기를 찾아 집으로 향합니다.

                              해마다 상강에서 입동 사이의 요맘때쯤에는 달력을 찍습니다.
                           추상적이고 비가시적인 시간을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숫자와 기호로 표현해내는
                           마법 같은 일입니다. 지금이야 달력이 개인이나 기업의 개성과 가치를 담아내는 기호와
                           상품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권력자의 상징적인 통치 행위였습니다. 달력을 만들어
                           배포한다는 것은 곧 시간을 만들어 배포하는 일이었습니다. 통치자는 자신이 지배하는
                           모든 영토와 공간에 자신의 의지가 담긴 시간 질서를 부여할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 시간은 권력의 행위이자 지배의 상징이었습니다.

                              지금의 달력은 근사한 이미지와 디자인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우리가 맞이하고 겪어가야 할 모든 날과 달과 해의 의미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창백한 숫자와 기호만이 가득 차 있을 뿐입니다. 태양력의 과학과 기술은 정밀하고 합리적이지만,
                           인간 삶의 복잡 미묘한 감각과 의미를 헤아리는 데는 그다지 뛰어나지 못한 듯합니다.
                              전통시대의 역서(曆書)는 이와 무척 달랐습니다. 예컨대 “자일(子日, 쥐의 날)에는
                           점을 치지 않고, 축일(丑日, 소의 날)에는 갓을 쓰고 띠를 매지 않고, 인일(寅日, 범의 날)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고, 묘일(卯日, 토끼의 날)에는 우물을 파지 않는다”고 하는 것처럼
                           그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상의 세목들이 촘촘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텅 빈 시간의 공포 앞에서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붙들어매줄 민속학적 상상력이 가득합니다.

                              이창익에 따르면, 전통시대에 일상의 시간은 역서에 의해 우주적이며
                           신화적인 시간과 소통한다고 합니다. 그는 “역서의 시간은 일상적인 경험의 시간을
                           우주화하는 장치일 뿐만 아니라, 우주적인 시간을 일상적인 시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장치”
                           ( 『조선시대 달력의 변천과 세시의례』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미 잃어버리고 만 신화적인 시간, 우주적인 시간을 다시 기억하고 헤아려보고 싶습니다.
                              올해 우리는 그 누구에게서 내년의 시간을 받게 될까요. 또 그 누구에게 나의 시간을 나누어주고
                           싶을까요. 우리가 서로 주고받게 될 시간과 달력에는 어떤 의미가 담기게 될까요. 문득 시간을

                           붙잡아서 깃대에 매달아 바람에 나부끼게 하면 시간은 어떤 모양으로 펼쳐질까 궁금해집니다.


                                                                                                     2020년 10월

                                                                                           아단문고 이사장 김호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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